공부를 하고 지식인이 되어야 하는 이유
교육 여행 2009/11/22 08:01 꺄르르학창시절, 암기교육에 입시지옥에 시달리다 못해 이제 공부란 얘기만 들어도 몸서리치는 사람들이 많죠. 안쓰럽고 안타까운 모습이죠. 공부란 세상을 살면서 끝없이 피어오르는 물음표에 스스로 마침표를 찍어가는 과정이건만 줄 세우기 한국교육에 지친 사람들은 책을 보거나 공부한다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두드러기가 납니다. 무식한 한국제도권 교육이 사람들의 호기심과 세상에 대한 열정을 다 앗아가 버린 것이죠.
그럼에도 사람들은 공부를 평생 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꾸 달라지는 세상풍경에 사람들은 궁금하니까요. 다만, 생겨나는 의문을 느낌표로 바꾸는 과정이 공부란 것을 모를 뿐이죠. 살아있다는 것은 낯선 것에 눈을 똥그랗게 뜨는 일, 평생 교육이란 말이 묵직하게 다가오는 이때, 사람들은 왜 글을 쓰고 공부를 해야 하는 걸까요? 공부자체가 삶이라는 권용선 수유너머 연구원을 만나 이야기 나눠봤습니다.
수유너머 구로에서 '발터 벤야민, 판타스맘고리아의 베일을 벗기는 시간' 강좌를 연 권용선씨 @조은별
“글이 밥이 되거나 쌀이 되는 건 아니지만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거나 삶을 의욕 할 수 있게 한다면”
-살아오시면서 글을 쓰시고 사람들과 소통을 하고 계신데, 글을 왜 쓰시게 된 이유가 있나요?
저는 아주 단순하고 소박한데, 할 줄 아는 게 이거밖에 없었어요. 더 잘하는 게 있었으면 다른 걸 했겠죠. 사람들마다 고유한 능력이 있을 텐데, 저는 책을 보거나 글을 읽거나 글을 쓸 때가 가장 편안한 거 같아요. 저란 존재 자체가 가장 익숙하게 하는 일인 거 같아요. 어떤 사람을 만나거나 어떤 장면을 보거나 어떤 사건을 경험하게 되더라도 글을 읽을 때만큼 온 몸을 전율하며 밑줄 치게 만드는 실감을 받아본 적이 없는 거 같아요. 그 맛에 글을 계속 읽게 되었죠. 어떻게 보면 어렸던 거죠. 온 천지와 세상이 다 텍스트니까요.
어떤 형태의 글이 될지는 모르지만, 더구나 제 글이 밥이 되거나 쌀이 되는 건 아니지만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거나 삶을 의욕 할 수 있게 한다면 좋겠고, 그런 종류의 글을 쓰게 된다면 가치 있는 일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글을 쓰게 된 거예요. 그런데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늘 새삼 느끼게 되네요.
-진로를 정할 때 갈등이나 고민은 없었나요?
대학을 졸업할 무렵, 진로를 정하잖아요. 처음엔 치기어린 마음에 글을 아주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저에게 재능이 있었으면 시인이 되고 싶었어요. 한동안 대학원 졸업할 때까지 시인이 될 수 있다면 다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런 일은 생겨나지 않았네요.
제 자신이 산문적인 인간이며, 시인의 재능이 없고 논리적인 글을 쓸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은 뒤 10년 동안 시를 안 읽었어요. 세를 제법 좋아했는데, 제 감성을 자극할만한 어떤 종류의 짓도 안 해야겠다고 생각을 한 거죠. 그 전에는 감성적 글쓰기도 많이 하고 문학작품들도 많이 읽었는데, 그 10년 동안 읽은 책들은 철학이나 사회과학 같이 대단히 전문적인 훈련을 요구하는 독서를 주로 했죠.
저랑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공장에 들어가거나 단체에서 활동하거나, 가장 널널한 사람들은 문화운동을 한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공부를 하여 글을 무기삼아서 살고 싶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그 말뜻을 잘 이해 못 하더라고요 둘레에 있는 친구들이, 너 괜히 변절하고 싶구나, 농담 삼아 이러고요. 이런 반응들은 한국사회에서 지식인들이 그런 존재였다는 걸 보여주죠. 다들 막연하게 학술운동이란 말은 들어봤는데, 글로서 운동할 수 있는 게 뭔지 느껴본 적도 없고,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거죠.
-글을 쓴다는 것은 계속 공부한다는 의미이기도 한데, 어떠신가요?
시간이 갈수록 평생 배우는 것이라는 생각이 강해지고 있고, 넓게 보면 공부자체가 삶이라고 생각해요. 옛날 사람들이 어떤 점에선 현명했다는 걸 새삼 느끼는 게, 관 뚜껑에 새기는 말이 학생부군신위라는 거예요. 말 그대로 삶을 배운 사람이란 뜻이죠. 이것이 학생의 본뜻인데, 지금은 어휘가 축소되어서 특정한 제도권 안에서 특정한 교육을 받는 특정한 연령대의 미성년을 말하고 있어요. 성년이 된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학생이란 의식을 갖지 않죠.
수유너머에 오셔서 공부하시는 분들은 살다보면서 풀리지 않는 확 꽂히는 뭔가가 분명한 게 있으신 것이죠. 그렇게 다시 공부를 하시면서,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게 이거다, 궁금했던 게 많았는데 그게 어떤 의미인지를 말해주는 것들을 알게 되어서 고맙다고 하시죠. 보람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이 분들조차 가장 중요한 걸 빠뜨리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최근 들어서 평생 교육얘기가 나오고 인문학열풍도 불면서 공부를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게 되긴 했는데, 가르치는 직업에 종사하다보면, 사람들은 본인이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측면이 보이더라고요. 뭔가를 배울 때조차도 나중에 그것을 가르치는데 써먹기 위한 기술 정도로 이해할 뿐 자신이 온전하게 배우는 존재로 확 바뀌는 거 같지는 않아요.
만나는 사람은 모두 다 스승님이죠. 풀이나 풍경을 바라보더라도 쟤네는 저렇게 사는 걸 배우죠.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은 존재 자체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서로 기운을 주고받아요. 세상과 자연을 보면서 여러 생각도 하고, 많이 배우게 되죠. 따라서 글이나 문장들을 자기 것이라고 소유권을 표시하거나 주장하는 건 이상하긴 해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은 수많은 스승님들로부터 온 것이니까요.
그 누구든지 더 행복해지고 자유로워지려면 공부를! 영화<플라이 대디>
“스스로 공부를 하여서 모두가 지식인이 되어야 해! 스스로 깊이를 갖지 않으면 예속될 수밖에 없어”
-지식인은 특정한 집단이라 하는 생각이 사회에 깔려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왜 사람들은 자신을 지식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거죠? 모두가 지식인이 되어야 해요. 스스로 공부를 하여서 지식인이 되어야 하고, 알고 싶은 걸 알아가는 수고를 누구나 해야 된다는 거예요. 삶의 깊이는 이런 태도를 갖는 데서부터 나온다고 생각해요. 이런 수고로움이나 노력을 하지 않으면 언제나 대상화돼요.
아무리 거대한 지식을 배우고 고상한 얘기에 귀 기울이고, 심지어 부처님과 예수님 말씀을 들어도 스스로 깊이를 갖지 않으면 시스템에게든 지식에게든 자기존재자체가 어떤 식으로든 예속될 수밖에 없는 거죠. 생각을 바꾸거나 자신의 위치를 이동하지 않으면 속박된 상태가 딱히 바뀌지 않고 계속 그대로 가게 되죠.
사실, 지식인이라고 하는 집단의 이미지를 어떤 이들만 갖고 있어요. 글을 읽고 쓰고, 자신이 못 알아드는 말을 하거나 전문적인 얘기를 하면서 고급정보만을 가지고 있다는 이미지를 지식인이 갖고 있죠. 이 틀을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는 한, 본인 스스로도 지식권력에 기여하고 있는 셈이고 영원히 지식권력은 유지될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보통 사회에 퍼져있는 통념을 깨뜨리고 다른 생각을 해야 할 텐데, 이게 쉽지 않습니다.
다르게 생각하는 게 중요하죠. 예를 들어, 지금 느끼는 거, 보고 있는 풍경, 마주친 상황에 대해서 글을 써야겠다, 정말 잘 쓰고 싶다는 마음이 아주 강하게 생겨나서 그것에 대해 아무리 열심히 써도 늘 빈공간이 있잖아요. 언어는 타고난 한계성이 있죠. 존재하는 것들에게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냥 사회약속이에요. 사물 그 자체와 사물을 부르는 이름 사이엔 간극이 있는 것이죠.
인간의 말은 근원적 한계가 있기 때문에 말과 글로 최선을 다해서 표현을 하더라도 늘 부족함이 있기 마련이에요. 이 부족함의 이유엔 표현하는 기술이 모자란 것도 있겠지만 불필요한 오해와 잉여 같은 것들이 늘 따라붙기 때문에 생기도 하죠.
저는 궁여지책으로 무슨 수가 없을까 생각하다가 이미지라는 것이 언어를 대신하진 않더라도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한동안 사진에 미쳤던 시절이 있어요. 열심히 찍다가 보면 세상을 보는 방식이 달라지지 않을까 해서 사진을 열심히 찍었죠. 요즘엔 시간도 없고 필름 값이 아까워서 잘 못 찍는데, 렌즈로 세상을 보니까 맨눈으로 볼 때와 다르게 보이는 게 있더라고요.
저한테는 놀라운 경험이었어요. 렌즈로 세상을 볼 때 놀라운 게 아니라 맨눈으로 세상을 볼 때, 아, 이 장면은 렌즈로 어떤 구도에서 어떤 각도로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역으로 하더라고요. 예전에는 이 상황을 어떻게 묘사하고, 내가 느끼고 있는 감흥을 어떻게 표현해야 사람들과 교감할 수 있을까 고민을 했을 텐데, 카메라에 익숙해지니까 이건 몇mm, 초스피드는 얼마로 찍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동시에 든다는 거예요.
글쓰기가 게을러지는 측면도 있겠지만 보는 방식에 변화를 가져오는 게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 이런 비유를 든 거예요. 제 경험으로도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바꾸거나 바라보는 관점을 달리하였을 때, 생각이 달라지고 삶이 바뀌더라고요. 아는 만큼 배울 수 있다는 게 맞아요. 생각을 많이 하고 더 알게 되고 실수를 많이 하다보니까 사소한 거 하나라도 배울 수 있는 게 많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세상이 나에게 보여주는 텍스트들을 주의 깊게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나이가 들수록 드네요.
일본 도쿄 가미히라이 초등학교 학생들이 아침독서를 한 뒤에 교사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서로 손을 들고 있다. @오마이뉴스 신향식
자신이 갖고 있는 앎의 그릇만큼 삶을 담을 수 있어! 행복한 삶을 아름답게 빚으려면 공부를 해야
처음부터 준비된 인생은 없습니다. 자신은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존재가 아니란 거예요. 성별, 외모, 인종, 지역, 학벌, 계급 등등 여러 요소들을 ‘우연히’ 마주치면서 ‘나’를 이루며 살아갑니다. 이 말은, 지금 자신의 모습은 정해진 결과가 아니라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출발점이라는 뜻이죠. ‘나’는 기성품이 아니라 ‘현재진행형 작품’이에요. 오늘을 어떻게 보내고 어떤 태도를 갖느냐에 따라 앞날의 나는 달라집니다.
그래서 공부를 해야 하죠. 공부만이 딱딱해져 가는 자신의 생각들을 깨부수고 주저앉고 싶은 엉덩이를 일으켜 세우니까요. 세상에는 알아야 되는 것도 참 많고 공부할 것도 산더미처럼 쌓였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살려면 배우고 또 배울 수밖에 없죠. 세상이 변하는데 공부를 하지 않으면 어느새 고장 난 라디오 되기 십상이죠. 현재 사람들과 주파수가 맞지 않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데도 호랑이 담배피던 얘기를 되풀이하는 꼴이 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아는 것이 적으면 사랑하는 것도 적다고 말을 할 만큼 참된 앎이 많으면 많을수록 자신에 대한 사랑과 세상에 대한 희망도 커집니다. 사랑을 하려면 앎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나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꽤나 발품을 팔고 시간을 들여야 하는 어려운 일이죠. 편한 것에 길들여진 몸은 조금만 틈이 나도 돗자리를 펴 누우라고 옆구리를 간질이죠. 눕는 순간, 그것이 늚음이죠. 늙지 않으려면 끝없이 자신을 돌아보면서 스스로를 낯설게 여겨야 합니다.
이성을 중시하는 철학자 데카르트는 암스테르담을 여행하면서 큰 충격을 받아요.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프랑스에서만 인정받는 것이었으니까요. 자기 자신이 믿고 있던 것들이 여행이란 ‘낯설게 하기’를 거치면서 허물어졌던 겁니다. 그렇게 데카르트는 거듭날 수 있게 되죠. 데카르트는 여행에서 큰 울림을 받고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며 모든 것에 물음표를 던지게 되죠. 끝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며 근대의 주체를 탄생시킵니다.
꼭 대단한 업적을 남기지 않더라도 공부를 해야죠. 배움이 중요한 까닭은 앎이 삶을 이루기 때문이에요. 여태까지 자신이 겪은 경험과 머릿속에 들어간 생각들이 지금 자신을 이루고 있습니다. ‘나’란 존재는 자기 자신이 알고 있는, 딱 그 만큼입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앎의 그릇만큼 삶을 담을 수 있습니다. 불행하다면 불행한 앎을 알고 있기 때문이죠. 공부는 자신의 그릇을 만드는 작업, 행복한 삶을 아름답게 빚으려면 공부를 해야 합니다.